1. 지역사회복지 태동기(1890~1910년대)
19세기 미국 사회의 급속한 산업화는 기술의 발전과 산업의 집중화 현상을 야기했고, 이는 노동시간, 작업조건, 안전, 아동노동 등에 있어 광범위한 사회문제를 야기하였다. 산업화의 직접적 결과로 도시의 인구가 집중되는 도시화로 인해 특히 농촌지역, 남부지방, 유럽으로부터 미숙련 노동자의 이민이 급증하였다. 이들은 도시의 가장 오래되고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 주거를 마련하였다. 이 지역은 위생 상태와 건물 상태가 열악하지만 시 당국에 의해 제공된 사회복지서비스는 매우 미흡한 수준이었다. 주로 공장이나 공사장 지역, 슬럼 지역에서 생활하게 된 그들은 빈곤과 질병에 쉽게 노출되어 비참하고 열악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19세기 초반 북서부 유럽에서 이주한 이민자들을 필두로 남부와 동부 유럽인과 아시안, 멕시코인을 비롯하여 푸에르토리코인들에게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종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민 증가는 이민자들의 미국 내 적응 문제와 관련하여 다양한 사회문제를 발생시켰다. 게다가 남북전쟁(1861~1865) 이후의 흑인에 대한 사회적 권리가 충분히 확보되지 못하여 흑인문제가 제기되었다.
남북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전개된 지역사회복지 활동 중 오늘날의 사회복지 활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대표적 조직으로는 자석조직협회(COS: Charity Organization Society)와 인보관(Social Settlement) 운동을 들 수 있다. 미국의 자선조직협회와 인보관운동은 영국의 자선조직협회와 인보관운동의 근본 이념, 주요 활동가, 활동 내용 등이 매우 유사하다.
1877년에 뉴욕 주 버펄로 시에서 영국 성공회 소속인 거틴(Gurteen) 목사에 의해 최초의 자선조직협회가 창설되었다. 그는 구제의 신청이 있을 경우 즉시 조사할 수 있도록 교구 사업단체를 조직하고, 자선의 방법에 관하여 강연을 하였으며, 각 자선단체 간의 중앙연락기구의 설치를 제의하여다. 그 결과로 버펄로 자선조직협회는 모든 구제단체를 동등하게 처우하게 되었다.
인보관운동으로 1886년에 코이트(Stanton Coit)는 1884년 영국의 바넷(Barnett) 목사가 런던의 동부 슬럼 지역에 세운 토인비 홀(Toynbee Hall)을 방문하고 뉴욕으로 돌아와 유명한 헐 하우스(Hull House)를 시카고에 건립하였고, 그 후 인보관운동은 전국의 도시로 급속히 확대되었으며, 1891년에 6개이던 인보관이 1910년에는 400개를 넘어섰다. 세계 최초로 인보관이 설립된 영국이 1920년에 겨우 66개소로 증가한 것과 비교해 볼 때 미국의 인보관은 확실히 양적으로 팽창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로 미국의 넓은 국토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당시 미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수많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인보관운동의 효과성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2. 지역공동모금과 협의회 발전시기(1914~1929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대공황이 도래되기까지의 시기로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인종 간의 갈등과 대립이 더욱 심화되었다. 1920년까지는 전 국민의 반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게 되었고, 세계대전으로 생산품의 수요가 증대되어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기간 흑인들은 백인들의 적대행동으로 인종 폭동을 일으키기도 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 재발에 대한 위기의식이 감돌았으며, 러시아혁명으로 인해 세계의 힘의 균형이 파괴되어 미국의 생존이 위태롭다는 불안이 팽배하였다.
도시화가 가속됨에 따라 도시빈민의 문제를 다루는 사회복지기관들이 계속 증가되었고, 이들 기관들은 재정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사회복지기관의 재정 충당을 위해 400여 개에 달하는 사회복지기관들의 지원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전시모금기구(War chests)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사회복지기관들의 재정지원은 해외의 빈곤자 구호와 전쟁으로 인한 사회복지 대상자 지원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차 세계대전 동안 전시구호사업이 늘어나자 모금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가속화되면서 모금창구의 단일화와 회계의 투명성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지역공동모금제는 다양한 방법들로 창설되었다. 첫째, 사회복지기관들이 단독으로 하는 것보다 공동으로 하는 것이 더 많은 모금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공동모금제를 실시하였다. 예를 들어, 1887년에 덴버 COS의 23개 회원기관 중 15개 기관이 공동모금을 했는데, 재정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둘째, 사회복지기관협의회에 의해 조직되기도 하였다. 셋째, 가장 일반적 형태인 거액기부자들에 의해 설립된 경우이다. 이 형태에서는 자선보증기구를 통해서 사회복지기관의 기준을 설정하고, 기관의 활동 능력을 평가한 다음, 평가에 통과한 기관을 지원해 주도록 상공회의소 회원과 대중에게 권고하였다. 그러나 자선승인기구가 사회복지기관의 자율성을 침해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갈등을 타결하기 위해 지역공동모금제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는 1913년 클리블랜드(Cleveland)의 상공회의소에 '자선연합회(Federation for Charity and Philanthropy)'가 창설되었다. 이는 미국 지역공동모금 역사상 가장 획기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 자선연합회는 기부자+모금활동을 돕는 사람+기금의 지원을 받는 보건·복지·오락 단체를 대표하는 단체장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빈민을 돕는 사람들이 유급화되었고 교육체계 등이 점차 전문성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사회사업지도자들이 협의회를 조직하고자 한 이유는 사회복지사업을 합리적으로 조직화하고 지역공동모금회의 모금 능력을 강화하여, 자신들과 사회사업기관의 독립성과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협의회가 점차 전문화되어 감에 따라 협의회는 복지서비스에 관심을 갖는 시민들의 협의회로 재구성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변화 때문에 명칭이 '지역복지협의회'로 변화하였다.